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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방송
겨자씨 한 알의 비전
설교일 | 2014-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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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구분 | 주일대예배 |
본문 | 막4:30-32 |
설교자 | 이현기 목사 |
말씀: 막4:30-32
제목: 겨자씨 한 알의 비전
막 4: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막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은 겨자씨 비유를 언급하고 있는 다른 본문인 누가복음 13장(22~23)을 보면, 사건
직후에 제자들이 나와서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아무리 전도하려고 해도 적은 숫자밖에는 따라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아주 미미했습니다.
반대와 핍박에 부딪히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잘 하는 것일까”, 제자들은 패배주의와
비관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시점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다. 그러나 이 작은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은 현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겨자씨가 자라나듯이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토가
작아서 그런지 유달리 큰 것을 좋아합니다. 서양인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하는데, 우리는 ‘세계 최고’, ‘동양 최대’라는
말은 잘 써도, ‘세계 최소’라는 말은 안 씁니다. 나라 이름도 대한민국, 최고 수반은 대통령, 최고 학부는 대학교, 외교사절은 대사, 길들을 모아도 양재대로, 강남대로 라고 부름니다.
다리를 놓아도 우리나라 다리는 다 큰 것만 있습니다. 광안대교,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청풍대교, ...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길고 넓고 오래된 명물이지만 이 다리를 미국인들은 대교라 부르지 않습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은 잔에 마시면서 대포라고
합니다. 더 아나가 왕대포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예배가 있는데, 주일오전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일오후예배는 ‘소예배’입니까? 그 외에도 대강당, 대운동장, 대청마루, 크지도 않은데 대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조건 큰
것을 좋아하는 모습은, 큰 차, 큰 집, 큰 교회, 등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참 큰 것을 좋아하는 이것은 작은 것을 보상받으려는 열등감, 보상
심리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들을 비하시켜서 자꾸 감추려고 하고 작다는 것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다는 것은 안 좋은 쪽으로 평가됩니다. 작은
것도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미래의 기술은 작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나노기술’이라고 하죠? 10억분의 1
.... 앞으로 미래는 작은 것이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앞으로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것 속에 있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열등감과 비관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겨자씨 한 알의 꿈을 이야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위대한 것도 갑자기 커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 미약한
시절을 거칩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위대한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위대한 일은 작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물 한 방울씩 모여
작은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여 강이 되고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됩니다. 작은 모래 하나 하나가 모여 해변을
만들고 또 사막을 만듭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기업인 삼성 그룹의 설립자인 이병철 회장은 쌀 300석으로 시작하여 쌀장사, 모직 사업, 비료 사업, 설탕 사업을 하면서 한국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마침내 삼성이라는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어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질 뿐입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용맹스럽기로 소문났습니다. 다리우스가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알렉산더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사신을 통해 선물을 보냈습니다. 알렉산더가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니 참깨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리를 하는 중에 한 신하가 “다리우스의 군대가 깨와 같이 많으니
까불지 말고 항복하라는 뜻입니다”라고 풀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작은 봉투에다 겨자씨 하나를 넣어서 다리우스 왕에게 보냈습니다. 다리우스도 역시 신하들에게 ‘이것을 무슨 의미로 보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신하가 “알렉산더의 군대가 작아도 무섭고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는
알렉산더의 승리였습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 안에 잠재해 있는 생명 때문에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겉모습이 겨자씨같이 작고 보잘것없이 보인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놀라운 꿈과 비전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며 기적을
만드는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겨자씨가 그렇게 자라고 커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단순히 작은 것의 중요성만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많이 있습니다. 모래알도 작고, 먼지도
작습니다. 그러나 굳이 겨자씨를 비유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겨자씨가
모래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입니다. 직경 1mm. 이렇게 작은 씨가 나중에
자라면 평균키가 1.5m, 어떤 종자는 3m 이상 자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겨자씨의 생명력을 복음의 생명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이 능력입니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기독교의
최대 자신이요 우리 인생의 꿈과 소망, 반석과 능력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있으면 다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전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현실이 불투명하고 고통스럽지만
현실 건너편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들이 있음. 내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제자들이
불평하고 좌절했을까요? 주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한 것,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복권에 당첨되듯이 큰일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1937년 완공돼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된 금문교는 현수교입니다. 현수교는
거대한 강철 케이블로 다리의 무게를 지탱하는 교량입니다. 이런 건설 방식은 100여년전 부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물살과 파도가 거센
강에서 어떻게 그 거대한 강철 케이블을 설치할 수 있었을까요? 비결은 작은 연에 있습니다. 먼저 작은 연을 날려 강 건너편에 떨어뜨립니다. 일단 건너편에서
연의 줄을 확보하면 연줄보다 약간 굵은 줄을 연결해 당기도록 합니다. 결국 그런 식으로 차차 줄의 굵기를
높이면 나중에는 거대한 강철 케이블도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한 연과 연줄이지만
그것이 거대한 강철 케이블을 견인하는 최초의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위대한 업적도 단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정반대로 잘못된 작은 시작이 인류의 큰 비극을 가져온 일도 있습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한 것 때문에 역사상 유래 없이 600만의 유태인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데리고 있었지만 결혼한 일이 없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히틀러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행상인이었으므로 물건을 밖에 나가서 팔고 들어오는데
때로는 한 달도 걸리고 두 달도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어머니가 고독을 견디다 못해 이웃에 사는
돈 많은 유태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말았습니다. 어린 히틀러는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에게 눈물로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히틀러는 유태인과 여자들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범죄로 히틀러의 마음에 증오의 씨앗이 싹이 트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역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비극을 남겨야 했습니다.
성경에도 예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었는데 다윗왕이 낮잠 자고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반합니다. 그 일로 다윗이 간통하고, 그 남편인 충실한 장수를 죽이고, 그것 때문에 선지자의 책망과 예언을
듣는데, 그 예언대로 다윗 왕국에 무서운 재난이 닥쳐옵니다. 다윗의
집안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가 큰 난리를 치르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엄청난 사건의 원인이 다윗이 눈길
한 번 잘못 돌렸기 때문에 시작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눈길 한 번 잘못 돌려서 온갖 비극이 인류에게 덮친
것입니다. - 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이나
고생한 것도 가나안을 정탐한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말씀합니다(갈 5:9). 크고 위험한 악도 처음에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외모가 출중한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리더쉽이 뛰어 난 사람, 돈 많은 사람, 사교성이 좋은 사람, 많은 학위를 가진 사람,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아마 모두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왕이면 그런 것들이 있으면
훨씬 낫겠죠’라고 속삭이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작고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전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전도를 하다 보면 흔히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약하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요.’ 이
말이 맞습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약한 사람들이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라고 이야기해야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정말 강한 존재입니까? 천하를
호령하던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미미한 모기에 물려 젊은 나이에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시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우리 인생은 티끌이요 풀이요 안개요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아니 5분 후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을 믿고 자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약한 자,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우리는 겸손이라고 표현합니다. 겸손은
결코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자기 비하는 자기를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치는 질과 희소성을 따지고 결정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가치 있는 것은 보통 유리와 달리 탁월한 질과 희소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결정할 때 감정 기준으로 보통 4C를 이야기
합니다. Carat(중량):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말합니다. 단위를 캐럿으로 표기 합니다. Cut(연마상태): 다이아몬드의 컷팅된 상태를 말합니다. Verry Good, Good,
Medium, Poor로 표기를 하게 됩니다. Clarity(내용물): 내부의 내용물이나 외부의 하자를 말합니다. 내 외부에 하자가 없을수록
빛의 투과와 반사를 더 많이 한다고 해서 가치가 높아집니다. 마지막으로 Color(색상) : 컬러는 DIAMOND의 D부터 시작해서 Z까지의 23등급으로
나뉘는데 색상이 전혀 없는 D컬러 부터 G컬러 까지 고품질로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이아몬드입니다.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그 다이아몬드가 다이아몬드로써의 가치를 발하기 위해서 cutting, 즉
깎이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깎이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만약 돌같이 흔하다면
가치가 확 떨어질 것입니다. 가치는 희소성에 있습니다. 만약
중세 화가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집집마다 걸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많다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하더라도 그의 그림은 가치가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희소성 100%의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약한 존재입니다. 고려 청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질과 희소성 때문에 값진 보물이지만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깨지기 쉬운 약한 존재이나 무엇보다 귀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가 귀중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는 아무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철저히 죄인이며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연약하고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먼저 그 사람이 가진 힘을 다 빼셨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애굽의 모든 학문과 지혜를 배우고 나이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이제는 자기의 조국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가 되었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침
기회가 왔습니다. 한 번은 공사장에서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치는 것을 보고 구하려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가 그 일이 발각이 되자 급히 미디안 땅으로 피신하여 광야 생활을 40년을 하게 됩니다. 그가 80세 노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모세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자신감이 다 사라져 버린 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다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애굽에 있는 동족들이 자신과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가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출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로 힘이 다 빠진 모세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그
힘은 육제적인 힘보다도 자신의 야망, 열정, 자신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다 빠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때인 것입니다. 내 힘이 남아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고집대로 하기가 쉽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게 됩니다. 운동을 잘 하기
위해 배워야 할 공통적인 원리 하나가 있습니다. 힘 빼기입니다. 저는
체력관리를 위해 동네 아파트에서 테니스를 치는데 제일 먼저 배운 것은 힘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은데 참 어렵습니다. 어깨에 힘을 빼면 공이 제대로 맞으면서 강하게 나가는데 반해 힘이 들어가면
의도하지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쳐 내기가 일수입니다. 자신의 힘을 내 세운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내 세우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아마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했다면
제대로 기입할 내용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 본명
시몬. 학력. 무, 직장
경력, 고기잡이외 아무 것도 없음. 요한: 상기와 동일함....이렇게 나가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은 석학 출신의 사도도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바로 쓰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는 아라비아 사막 등으로
이리저리 전전하면서 자신이 깨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대전에서 목회하시는 한 목회자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었습니다. 1950년 논산 출생,
불신 가정에서 딸 여덟, 다음 아들, 그 다음
자신이 10번 째 막내 아들, 어머니의 장남에 편애에 대한
불만을 품고 7살 때 대들다가 기절할 정도로 맞고 나서 아무런 꿈도 없이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농사 도우며 내일이 없는 인생 살다가 청년기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군대 갔다 와서 시골
교회 30명 정도 목회할 계획을 가지고 이름 없는 지방 신학교 다녔습니다. 시골에 갈 수 있는 교회가 없어 할 수 없이 빚을 얻어서 1980년
대전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17년 반을 오십 평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수천 평의 성전대지에다가 수천 명의 성도를 섬기고 있습니다. 설교
중 말도 좀 어눌하셔서 귀 담아 들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기도 중에 한밭 제일의
목양을 하라는 음성을 듣고 처음에는 마귀가 하는 소리인줄 알고 마귀야 물러가라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인 줄 알았을 때 그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주님, 저 같은 것이 어떻게 한밭 제일의 목양을 할 수 있나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밭 제일의 목양을 하려면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설교도 잘 해야 하구요, 지식도 있어야 하고 대인관계도 잘
해야 하고, 조직 행정도 잘해야 하구, 리더쉽도 있어야 하고... 얼굴도 어느 정도 생겨야 하고....’
‘그런 것 말고...’
‘그럼, 제가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면 되겠네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결심을 합니다.
‘그래 맞아....주님 사랑하는 거야 못 할 것 없지.’ 그 후 그는 정말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했고 놀랍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해 주셨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저도 그 간증을 읽고 마음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 나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이번에 경건의 시간을 하면서, 또 주일에 전할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생각했을 때 은혜가 많이 되었고 격려가 많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네가 앞으로 많은 것들을
갖추어야 너를 쓰게 될 거야. 리더쉽, 친화력, 탁월성, 성경 지식, 용기, 경영, 성령의 은사, 능력, 설교...준비해야 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구나...열심히 하거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저는 모세가 말한 것처럼 아마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겨자씨 한 알 같은 존재를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띄지도 않고 주목받지 못하고 지극히 작고 평범한 존재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씨앗을 싸고 있는 껍질이 얼마나 크고 멋있게 생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씨가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껍질은 썩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고 큰 씨앗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썩지 않고는 결코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크고 작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모세 안에 있던 생명이나 바울 안에 있던 생명이나 빌리 그래함
안에 있는 생명이나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나 다 같은 예수 생명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겉껍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예수의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자씨 가 심겨진 후에 자라 풀이 되고 언젠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찾는 안식처가 되듯이 우리 각자, 그리고
우리 교회가 수많은 영혼들이 찾는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또 다른 겨자씨들이
곳곳에 뿌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듯이 세계 곳곳에서 예수의 생명이 퍼트려지는 겨자씨 비전이 이루어질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 54: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사 54: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우리 하나하나는 작은 겨자씨입니다.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을 간직한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저 고귀한 정도가 아니라 무한대의
가치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성장과 번식을 합니다. 산에 자라고 있는 나무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려고 사람이 만든 트리는 겉모양은 비슷해도 전혀 다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그 안에 있는 생명 때문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
생명력이 존재하는 한 이 지구를 덮을 수가 있습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은 이웃에게 축복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성장이 이웃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작지만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작지만 우리는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의 삶이 이웃들에게 반드시 축복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크게 자라나고 그래서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줄 주 있는 그런 우리, 그런 가정, 그런 교회가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런 환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작은 겨자씨의 비전입니다.
‘내가 자라나 울창한 나무가 되고 가지를 펼칠 때 새들이 날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리라. 그래서 새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할 것이다.’ 나의 삶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주고 꿈을 주고 축복을 나누어주는 그런 인생을 살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겨자씨 한 알의 비전이요. 이것이
기독교의 성공관입니다.
세속적인 성공관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공관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셔서 내가 잘 되면 그 축복으로 내 이웃을 섬기리라는 것이 기독교의
성공관입니다. - 우리가 자랄 때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공부
좀 해라, 배워서 남 주냐?”, 그러나 배워서 남 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목적은 얻은 지식으로 인류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남
주기 위해 배우고, 남 주기 위해 버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성공관이며 재물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는 겨자씨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 그리고 잠재적 능력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언젠가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 시내가 흐르고, 새들이
찾아오고 잃어버린 영혼, 지치고 상처입은 영혼들이 찾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맺어진 겨자씨 열매가 사방으로 흩어짐으로 떨어지는 곳곳마다 똑같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겨자씨 비전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우리 생애에서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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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