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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방송
고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
설교일 | 2013-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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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구분 | 주일대예배 |
본문 | 히5:1-10 |
설교자 | 이현기 목사 |
말씀: 히5:1-10
제목: 고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
예수를 믿는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하인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인이 하인을 조롱하기를 "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아무 시험이나 고난도 없이 잘 만
사는데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왜 늘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당하느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는 게 더 낫겠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
사람은 "주인님 노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가령
말입니다. 사냥 중에 사슴 두 마리가 있어 총을 쏘았는데 한 마리는 즉사하고 한 마리는 다리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간다면 주인께서는 어느 쪽 사슴을 보고 달려가겠습니까?" "그야 총을
맞고 도망가는 녀석이지. 왜냐하면 죽은 놈이야 어차피 내 수중에 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산 놈부터 쫓아가
잡아야지"
" 옳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험과 고난이 없는 것은 영혼이 죽어 마귀의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는 마귀가 이를 방해하여 자기 수하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니 시험과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있나요? 그런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상하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 뜻대로 살고
있다면 반드시 시험과 고난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승리로
안겨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1-4절 말씀을 통해 구약에서 대제사장
직분의 자격 요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고, 5-10절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제사장 직분의 가격 요건에 대하여 완벽하게 갖추신 분으로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나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으며 당시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울에 의해 복음이 점점 확산되자 유대인들은 심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고 유대인 신자들을 향하여 심한 비난과 심지어 로마 당국과 결탁하여 박해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 신자 중에는 이러한 박해와 고난에 못 이겨 신앙이 흔들리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기독교는 유대교보다 우월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탁월하며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모세보다 다윗보다 더
위대하신 분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도 역시 사람입니다.
1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가운데 특히 레위 지파에서 선택된 자여야 합니다. 출29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아무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 즉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되려면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럼 대제사장의 직무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보석을 가슴의 흉패에 달고 일년에 한 차례식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대제사장의 제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죄가 속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최상의 정결함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시고 연약한 사람 중에서 제사장을 선택하였느냐?
2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
3절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이러 스미스라는 주교가 어느 날 정원에 있는 큰 돌 하나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보니 그 자리에 수 많은
개미 떼가 놀라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스미스 주교는 [ 나는 이 개미 떼를 전혀 해칠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이 개미들을
이해시키나? 어떻게 내 마음을 전달해 줄까? ] 라고 생각하다가
그 방법은 그 자신이 스스로 개미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스스로 인간이 되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단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히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 ] 라고 합니다. 그러나 [ 죄는 없으시니라 ]고 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도 역시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상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지만 자신 역시 죄를 속함 받아야 하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4절에서 대제사장 직분이 존귀하다고 합니다. 물론 지위적으로도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존귀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히 영적인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벧전2:9절에는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왜? 허물 많고 연약한 우리를 향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16:3절에
[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 합니다. 성도가 왜? 존귀한 자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제아무리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탤런트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불러주시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부름 받은 자가 존귀한 것은 롬11: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씀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착오가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놀라운 축복과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엡1:18절 이하에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하여 [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왜 귀합니까?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히브리서 기자가 대제사장 이야기 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5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
대제사장 아론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으나 우월적인
면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3장에서 모세와 비교할 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마는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하듯이 모세도 아론도 다 하나님의 집에 종이지마는 그리스도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2:7절 인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특권을 가지신 분이시며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된 것은 혈통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되었다고 합니다.
6절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시110:4절을 인용한 말씀으로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합니다.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하지만 아론의 반차를 좇아서 난다면
안됩니다. 왜 안됩니까?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들은 전부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린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론의 반차를 좇아서 온다면 여전히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죄 아래에 있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론과 같은 형식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 대제사장으로 오셨지만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죄인의 반차인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고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고 하는 것은 아론의 반차와는 다른 하나님의 반차, 즉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에 의해 낳음을 입은 모습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시편 2:7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낳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말은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고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멜기세덱이 누구입니까? 창14장에 보면 소돔 땅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붙들려 갑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사병 삼백십 팔인을 거느리고 그돌라오멜을 물리치고 조카
롯과 재물을 찾아 돌아옵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환영합니다. 그에 관해서는 창14:18절에
[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고 하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기에서는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그 이상 어떤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히7:3절에 보면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고 합니다. 그러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같은 형태의 제사장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보내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히6:20절에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들어 갔다고 합니다. 라틴어 성경에는 제사장을 <폰티펙스>라고 합니다. <폰티펙스>는
양쪽을 잇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마치 야곱이 꿈 가운데 본 하늘과 당을 잇는 사닥다리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폰티펙스>과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잇는 폰티펙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딤전2:5절 [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
오직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어떻게 감당하셨나?
고난 가운데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으니라]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라는 말은 고통 속에 신음하셨던 역사 속에 실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바로 고난의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본이 무엇인가?
1.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난이 오면 기도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불평 합니다.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잘 되다 가도 조그마한 일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제일 먼저 원망하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골탕 먹이느냐고 합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 한 것이 있기에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자기는 다 잘했는데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시 마음에서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지고 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나오려 하면 빨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고난이 오면, 뒤로 물러 갑니다. 자기 정죄에 빠지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자기 삶을 돌아보고 죄가 있으면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너무 정죄감에 빠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와 더 헌신을 하려고 노력 하세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신앙 생활을 좀 열심히 하세요 라고 말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다려 주세요. 좀 복잡한 일이 많이 있거든요? 어려운 문제들이 정리가 되면 나중에 열심히 할께요.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자들은 어려울 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 오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안정되고 나면 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뜻 들으면 신앙이 좋은 사람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어려운 문제는 자기 혼자 해결하고 나중에 평안할 때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연약한 분이시기에 자기 혼자 해결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혼자 다 해결하면 그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생활은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도 자라고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믿을 때 평안한 때였나요?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으면 못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핍박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이 얼마나 강하게
자랐는지 아세요?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목숨도 위험한 때였지만 그들은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 말씀 배우기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서로 봉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당할 때 더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말씀
배우고 서로 섬기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여러 교회에 다니며 그들에 대해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라는 말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직무를 감당하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7절 말씀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라고
합니다. 눅22:44절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
예수님은 고난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 이겨 셨습니다.
성도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벧전2:20절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그러니 성도에게 고난이 있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 가운데 기도를 통한 신앙의 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약5:13절 [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성도에게는 기도 만이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눈물로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로 승리하는 형제자매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2.
고난 가운데 예수님의 본은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는 삶입니다.
8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절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말씀을 <메튜헨리>는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온전한 자가 되었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소성케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해 나갑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은 그냥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고난이란
하나님 학교의 수업료이다. 그 고난이라는 학교에서 훈련을 잘 받고 졸업을 하는 학생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불순물이 적은 높은 순도의 정금을 만들기 위해서 뜨거운 불 속을 통과해야
되는 것처럼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할 때 우리의 인격이 다듬어집니다. 고난을 통과할 때 불순물이 제거
되기 때문입니다. 금도 저절로 좋은 금이 되지 않습니다. 불순물이
다 빠진 정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뜨거운 불 속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잘못된 것들을 태우고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럴 때 깨끗한 영혼이 만들어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에게는 고난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할 때 누구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부분들이 깎여져 나갑니다. 우리의
모난 인격들이 다듬어집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으로 변합니다. 이게 바로 고난의 목적입니다. 고난이나 고통 없이 자란 신앙인들은 순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려움이나 고난을 통과하다 보면 자신을 돌아 보게 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잠17:3절에서 “도가니는
은을, 플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통해 죄를 멀리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더 온전케 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시119: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게 됩니다.
욥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래서 늘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 라고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룩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교장이 1963년에 미국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미국 가기가 얼마나 힘들 때였습니다. 당시 미국을 갈려면 미국인 가운데 누가 제정보증을 써 주어야
했습니다. 전영창씨의 제정보증을 써 준 분이 계시는데 국민학교 겨우 졸업했지만 자기 이름 사인 하나
제대로 못할 정도로 I.Q가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식하여서 어디 취직도 못하고 광산을 조금하다가 실패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그것도 실패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제재 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성공하여 일약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의호식 하며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좀 살만하니 심장이 좋지 앉아 50도 못되어 일을 놓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때까지는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자랐고 살아왔지마는 자기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고 나니 할 일이 없습니다. 하루는 자기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고등학교에서 한국영화를 한다기에 자기 부인과 함께 구경을 갔습니다.
그 영화는 밥 피얼스라는 미국인이 6.25 동란 때 찍은 것으로
한국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중에는 고아들이 한강 철교 있는 데서 쓰레기통 속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들추어 먹는 광경이 나왔습니다. 이 분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날 밤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 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1955년 가을에 한국에 와서 보니 고아들 가운데서도 혼혈아들이
제일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혼혈아 열 두 명을 데리고 와서 8명은
자기가 키우고 4명은 자기 동생들이 기르기로 했습니다. 이
사실이 미국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랬더니 전국 각지에서 어떻게 하면 나도 한국고아들을 데리고 와서 키울 수 있느냐는 문의 편지가 일 주일
만에 4000통이나 왔습니다. 이 분이 바로 홀트 제단을 세운 <헤리 홀트>입니다. 그가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였기에 그는 더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당한 성도 있습니까?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하여 기도하세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세요. 그래서 그 고난을 때문에
더 온전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 순종의 본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하셨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나의 주변이 조금이라도 바귀어져 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이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말을 듣고 온전케 되는 방법도 바로 고난
가운데 당당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함으로 나의 삶과 주변이 더 온전케 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10절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으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폰티펙스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 가운데 기도하셨고 고난 가운데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하는
온전케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고난 당했다고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 고난을 기도로 축복으로 바꾸어 놓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나의 삶과 주위가 더 온전케 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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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었다고 생각될 때도 소망이 있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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