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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방송
구유에 오신 예수님
설교일 | 2013-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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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구분 | 주일대예배 |
본문 | 눅2:1-20 |
설교자 | 이현기 목사 |
말씀: 눅2:1-20
제목: 구유에 오신 예수님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육신으로 오신 날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성탄의 정신을 배우고 성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계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성탄 관련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누가
다스리는가?
2.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에 대해
3. 목자들에게
첫 소식이 전해짐에 대해
1.누가 다스리는가?
역사가로서 누가는 로마 황제와 지방 총독의 이름을 명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생시기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사건들을 세계 역사와 연관 지어 제시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 기자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팔레스타인을 다스렸고 최초의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는 로마 통치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아구스도, 그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로마제국의 모든 지역을 일인 권력으로 통치하는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귀하다는 의미)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8월(August)는 그를 기릴 목적으로 그의 이름을 본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태어나셨고 가축의 여물통을 요람으로 삼으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께서는 이 지구의 가장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그 곳에 살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이 그분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대로(미5:2)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공포한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3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하는데
그들은 인구조사에 분노 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로마의 막강한 권력 앞에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힘든 여정이겠지만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꼭 마리아와 함께 가야만 되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있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특별한 천사들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태어날 아이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권세로 그 당시 문명 세계를 통치하였지만, 요셉은
아무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과 생각과 달랐겠지만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여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로마는 권력을 최대한 행사했겠지만, 실제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가는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누가 역사를 다스리는지?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구유에 오신 예수님.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 아기 예수는 구유에 뉘었습니다. 어둡고
더러운 마구간, 짐승의 여물통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왕
중의 왕이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은 이 지구의 가장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왕으로써 대접받고 섬김 받고 누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오히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위대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겸손하고
가난한 탄생은 바로 우리의 허영과 욕망을 거부하시며, 이 땅의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권세를 누릴리고 그 권세를 얻을려고 발부동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누릴려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님이 계시기에 충분히 넓고 아늑한지 생각해 봅니다.
어찌든지 내 마음대로 살고 싶지는 않은지?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지만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라.” 평범한 표현이지만, 이 말은 예수님 맞을 여유가 없는 인간들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호적하러 찾아온 다윗의 후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것은 여유공간이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딱한 임산부가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있을 곳이 없었다’ 라는 표현에서 돈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그 시대의 단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냉대하는 일그러진 사회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관 주인은 방을 차지한 손님들에게
프레미엄을 붙여 대목 장사를 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예수님은 부자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금도 주님의 것이요 은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비천한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시고 친구가 되기 위하여 친히 낮아지셨습니다. 친히 비천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음 놓고 주무실 장소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 타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실 때도 남의 다락방을 빌렸습니다. 심지어 무덤에 묻힐 때에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을 빌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가난해지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맞이할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세상
재물에 마음이 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의 마음으로 구유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3. 목자들에게
양을 치는 일은 여러 가지 직업 중 가장 비천한 일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국외자로서 도시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도적질을 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신뢰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누가가 목자들에 대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권력자들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한자들, 국외자들, 사회적
계급 중 최하위에 속하는 자들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자기 아들의 탄생에 대한 첫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눅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낮은 데로 돌립시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성탄의 정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구유에
오신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 위한 다면, 주님의 친구가
되기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져야 되고 섬김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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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보다 더러운 내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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